코로나가 터지고 난 후 온 가족이 집에서 세 끼를 챙겨 먹으니 적어도 하루에 두세 번은 설거지를 하게 된다. 밥 차리는 것도 일이지만 치우는 것도 일. 더군다나 요리는 뭔가 창의적인 일에 가깝다면 설거지는 그냥 소모적인 일로만 느껴진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안 하고 싶은... 미루고 싶은 일인 것 같다. 물론 식기 세척기가 부담을 덜어줄 수 있지만 나는 식기 세척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식기 세척기가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식기류가 적기 때문에.....식기류를 쓴 후 바로 씻어 놓지 않으면 다음 식사 때 쓸 식기류가 없다... 그러니 식기 세척기가 가득 채워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채워지지 않은 채로 돌리자니 전기세가 아까워 잘 쓰지 않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그때 설거지가 나오는 대로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것이 속 편하다.
나는 요즘 설거지가 즐겁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이런 말을 들으면 '왜?'라는 물음표가 달릴 것이다. 나의 즐거운 설거지 생활을 만들어준 장본인은 바로 '에어팟 프로'이다. 컨퍼런스 콜을 자주 하는 남편이 고심 끝에 에어팟 프로를 먼저 구입하고 써 본 후 완전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만났다며 극찬을 해 오다가 어느 날 나에게 깜짝 선물로 에어팟을 안겨 주었다. 사실 그 전까지 유선 이어폰을 잘 사용해 왔기 때문에 무선 이어폰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고, 아무리 무선이라고 해도 이어폰에 그런 큰 돈을 쓴다는 게 의아했기 때문에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물이니깐 ㅎㅎ 기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다른 세상을 만났다...... 나의 동선을 제한시켰던 선이 없어지니 이동에서 자유로웠졌다. 그리고 노이즈 캔슬링 모드는 세상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통화를 할 때에도 더 이상 뜨거운 핸드폰을 얼굴에 대고 있을 필요가 없었고, 뛰어난 마이크 성능 덕분에 작은 소리로 말해도 충분했다.
어쨌든 이 에어팟 덕분에 설거지하는 시간은 나의 '레크레이션 타임'이 되었다. 이전에도 설거지하는 시간이 너무 지루해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며 한 적이 있었지만 물 소리때문에 영상에서 나는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영상을 보면서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를 어떠한 방해없이 선명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나는 왜 굳이 설거지를 할 때 영상을 보면서 설거지 시간을 기다리는 걸까?
1. 왠지 모를 죄책감에서의 해방.
'죄책감'의 사전적 의미는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이다.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잘못인가? 그건 아니다. 나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주고 힐링이 된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땅히 내가 할 일(구체적으로 공부...더 구체적으로 논문)을 위해 쓰지 않고 단지 나를 즐겁게 하는 무엇가에 쓰고 있을 때, 귀한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다는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낀다. 그래서 시간을 따로 떼어 놓고 재미있는 영상을 보면 즐거운 동시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며 죄책감이 느껴진다. (사실, 시험 기간에 보는 만화책이 더 재미있듯이 불안한 마음을 갖고 보는 유튜브는 더 재미있다.)
하지만 설거지를 하면서 영상을 보면 그런 기분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설거지는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고, 설거지를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어차피 생산적으로 쓰일 수 없는 그 시간을 나의 즐거움을 위해 마음껏 쓴다.
2. 온전한 나만의 시간 확보.
가끔 소파에 누워서 유투브를 보거나 영화를 볼 때면 온전히 집중을 할 수 없다. 내가 쉬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에 쉬도 때도 없이 두 아들로부터 방해를 받게 된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30분을 확보하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설거지를 할 때는 엄마가 바쁘다는 것을 상황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무언가 부탁을 해야 할 상황이 생겨도 일단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즉,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나의 레크레이션 타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3. 일석삼조의 효과.
내가 즐겨 보는 영상은 주로 미드이거나 '테드', '세바시' 등 강의 위주의 영상이다. 미드를 보면 영어를 듣게 되고, 강연을 보면 내용에 따라서 지식을 얻기도 또는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설거지를 하면서 이러한 영상을 보게 되면 설거지도 끝내고 배움도 얻을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가 난다. 그러므로 설거지 시간은 더 이상 소모적인 시간이 아니게 된다. 또한 설거지는 나 자신만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활동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는 법. 즉, 설거지 하나로 자존감까지 높아지는 일석 삼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셈이다.
난 오늘도 내 레크레이션 타임에 무엇을 시청할 지 행복한 고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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