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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상 이야기

정전의 나라 미국

Image by Stux from Pixabey

 지금 시각은 새벽  6 30. 언제부터 비가 온 걸까. 새벽 5시쯤인가....창문을 타닥 타닥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블라인드 틈으로 밖으로 내다 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곧 있으면 아침인데 아직도 한밤중인 것 마냥 칠흑같이 어두웠다. 저 멀리 가로등 불빛만이 검은 도화지에 그린 별처럼 빛났다. 커피를 내릴까. 말까. 어제 자기 직전에 커피 한 잔을 마셨으니 오늘 아침은 스킵하자...라고  마음먹은 뒤 생수병 하나를 집어 들고 책상에 앉았다.

 쓰다 만 글들이 노트북 바탕화면 여기저기에 어수선하게 놓여있다. 왜 하나의 글을 깔끔하게 완성하고 다음 글로 넘어가지 못 하는 걸까.  멀티태스킹을 한답시고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벌인 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경험을 하면서도.... 글마저도 정신없이 쓰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난 진정 주의력 결핍 장애를 안고 있는 것인가.. 성인용 ADHD 자가 테스트라도 한번 해 볼까......별 생각을 다하며 쓰다 만 글 파일 하나를 열어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창밖에서 뭔가 번쩍인다. 번개가 쳤다보네.. 10분 정도 지났을까다시 한번 번쩍..

 그러고 바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불이 꺼졌다. 또 정전이다.  ……. 아까 커피를 내릴 걸 그랬다. 언제 다시 전기가 들어올 지 모르는데……더 이상 선택할 수 없으니 갑자기 커피향이 미친듯이 그립다참 이상하다. 선택지에 있을 때에는 별 생각이 없다가도 그것이 내 선택지에서 사라지는 순간 무척이나 아쉽다

 이 나라에 온지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는데 그간 한달에 한 번꼴로 정전을 겪은 듯 하다. 한국에 살 때는 언제 정전을 겪어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30년 전쯤? 어릴 적 집 한쪽 서랍에는 언제나 흰 초와 성냥이 들어있었다. 그만큼 정전이 잦았다는 뜻일 것이다. 정전이 되면 항상 흰 초에 불을 붙이고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는데 그 시간을 난 은근히 즐겼다. 이 때는 언제나 무서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뉴욕 타임스퀘어

   미국에서 처음 머무른 곳은 뉴욕이었다. 센트럴파크와 타임스퀘어를 10분정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레지던트 호텔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촛불도 없고, 휴대용 램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휴대폰 배터리도 얼마 없는데곧 다시 들어오겠지 뭐.... .

 얼마나 지난걸까... 발코니에 나가 밖을 내다 보았다.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밖은 암흑천지였다. 신호등조차 꺼져버린 상황..... 어둠 속에서 사이렌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아서 교통 사고가 난걸까....걱정스럽게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대각선 위층 발코니에 나와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정전이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은지 물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정전으로 고층 건물들의 엘레베이터가 갑자기 멈춰버려 사람들이 갇혀 있다고 말해 주었다. 지하철도 운행이 중지되어 많은 뉴요커들의 발이 묶였다고 한다. 

 밤은 더욱더 깊어가고 불빛없는 뉴욕의 밤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하염없이 밖만 쳐다보고 있는데 도로에 하얀 불빛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신호등이 없는 어둠 속에 홀로 서서 스마트폰 플래쉬를 켜고 차들에게 직접 수신호를 보내주고 있었다. 정말 성숙한 시민 의식이다.... 

 

Image by Milada Vigerova from Pixabay 

 다음 날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전 날의 정전이 1997년 7월 13일 일어난 뉴욕 대정전으로부터 정확히 42주년만에 발생했다는 것을. 그리고 42년 전 대정전과 달리 강력 범죄 대신 성숙한 뉴요커의 시민의식이 돋보였다는 점. 정전으로 공연이 취소되자 연주자들이 밖으로 나와 길거리에서 간이 공연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정말 감동이었다.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뉴욕 한복판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전을 경험하다니.. 기막힌 타이밍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아주 자주 정전을 경험했다. 1년에 대여섯번 정도... 느낌은 평균 한 달에 한 번꼴로.. 

 대부분의 정전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발생했다. 그런 날에는 정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터넷이 종종 끊긴다. 미국에 온 지 일년이 지난 지금 비가 오는 날을 마주할 때면 잠시 디지털 세상에서 벗어나 아날로그 삶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