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아빠와 아들이 단 둘이서 산책을 나갔다. 아빠와 첫째 아들만 밤중 나들이를 한 것은 아이의 천식 때문이었다.
첫째 아들은 소아천식으로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환경에서 숨쉬기를 힘들어한다. 어릴 적 아이는 기침 소리와 가슴에서 나는 쌕쌕거리는 소리를 달고 살았다. 숨소리가 많이 안 좋아질 때면 근처 소아과에서 네뷸라이저를 빌려와 밤낮으로 집중 관리를 하곤 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미세먼지에, 집 근처 아파트들이 연이어 재건축 공사를 하면서 공사 먼지가 끊이지 않아 아이의 증상이 더 심해질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난다.
(네뷸라이저는 기관지 천식이나 만성폐쇄성 폐질환 환자들이 흡입 치료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장치로, 약물을 미세한 입자의 기체 상태로 바꾸어 환자의 폐까지 전달해준다. '네블라이저' 혹은 '네블라이져'라는 표기도 종종 보이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nebulizer의 우리말 규범 표기는 '네뷸라이저'이다. 외래어를 만날 때면 언제나 표준국어대사전을 확인해 보고 확실한 표기법을 알아두는 직업병이 있다.^^)
미국으로 온 뒤 아이의 가슴에서는 더 이상 쌕쌕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 준비를 위해서 집에 박스 수십개를 들여 놓여 놓았는데 그게 문제였던건지, 박스를 들인 날 무렵쯤부터 아이는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신선한 공기를 쐬면 나아질 듯하여 그렇게 아빠와 아들은 산책을 나갔다.
글로 남기고 싶었던 부분은 이 날 아빠와 아들이 나눈 대화이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산책을 하던 중에 초등학생 2학년 아들이 뜬금없이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왜 나를 보내셨는지 궁금해. 나의 비전이 뭘까? 매일 밤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내 비전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
그리고 이런 얘기도 덧붙였다고 한다.
"난 오늘 갑자기 죽더라도 하나도 슬프지 않아. 내가 오늘 죽어야 한다면 슬퍼하지 않고 기분 좋게 웃으면서 죽을 거야.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보지도 못한 생명들도 많잖아. 하지만 나는 엄마 아빠 아들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다가 가니깐......."
나 또한 요새 수없이 되뇌던 질문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왜 세상에 보내셨을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내가 가야할 길, 나의 사명, 나의 비전은 무엇인가... 30대를 정신없이 앞만 보고 뛰어온 뒤 숨이 차서 쉴 수밖에 없을 때.....비로서야 나는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생학년으로 치면 아직 1학년도 안 된, 다시 말해 나이 자릿수가 아직 두 자리수도 안된 아이가 비전을 위한 기도를 매일밤 한다는 말을 전해 들으니 엄마보다 30년 빠른 아이의 성숙함에 감사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빨리 커버린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씩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고 내가 지금까지 누려온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보다는 어떤 상황적인 이유때문에 하지 못한 것들,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더 내 마음을 채우곤 한다. 그래서... 인생의 반을 살아왔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가 있다. 그런 날에는 ‘그 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이라는 후회를 시작으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질퍽거리는 과거 여행을 한다.
아이는 오로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이 인생의 끝이라고 하더라고 기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아이의 말을 전해 들은 날 나는 또 한번 결심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내 삶의 매 순간마다 실천하기로....내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내게 현재 주어진 것들에 집중하고 감사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불행 안에도 감사할 순간은 항상 있었다. 그러니 감사하지 못할 순간이란 없는 것이다. Thank you for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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